지옥에서 천당으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상남 작성일12-02-21 16:52 조회3,122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지옥에서 천당으로
...
참으로 이상하고 기이한 일이다.
분명 충분한 여유시간을 갖고 대회장을 찾아왔다고 싶은데 대회장에 걸려있는 전광판시계는 9시3분을 가리키고 있는 가운데 대회장 분위기는 막 잔치집의 분위기가 파해가는 듯이 어수선하고 어지럽게 널려져있는 몇 개의 책상과 바람에 쓰레기더미가 흩날리는 것이 황량감마저든다.
대회는 9시에 시작인데 벌써 9시가 훌쩍 지나가버렸으니 언제 옷을 갈아입고 등판에 배번을 달고 물품을 보관하며 또 워밍업은 언제 한단 말인가. 이 같이 부가적으로 준비해야할 일들이 산적한데...
이미 대회가 개시되어 주자들이 모두 대회장을 떠나버린 것인지 썰렁한 대회장 모퉁이를 허둥지둥 배회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꿈이었다.
새벽 4시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 안도의 마음으로 진정하여 다시 수면을 청하지만 한번 놀라서 달아나버린 잠인데 다시 올 리가 없다.
얼마나 긴장되고 마음에 부담이 되었으면 악몽까지 다 꾸었을까.
아무튼 꿈의 내용으로 보아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즉 난전이랄까 고전이 예상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경험에 의하면 중요한 시험이나 대회를 앞두고 꿈에 시험장이나 대회장에 시간에 쫒기듯 도착하거나 지각하는 사례가 현시되면 불쾌한 결과가 반영되는 예시로 기억되고 있다.
전국에서 오늘 열리는 풀코스 대회만 하더라도 6곳이고 서울 한강변에 열리는 대회만 하더라도 고구려대회를 비롯하여 첼린저대회 및 서브-3까지 3곳이나 된다.
그런데 나는 왜 하필 다른 대회를 포기하고 유독 참가자가 한정적이고 완주의 조건도 무척 까다로운 서브-3대회를 택하여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인가?
서브-3대회는 서울마라톤클럽에서 주최하여 작년에 이어 올해로 두 번째 열리고 있는데 그 취지는 명실공히 참가자격과 완주요건을 엄격히 제한하여 최고의 러너를 발굴함으로써 양질의 마스터즈의 저벽확대 및 그 중흥을 꽤하고 아울러 최고의 명품대회로 정착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니까 서브-3주자를 비롯하여 3시간 9분 59초의 기록을 보유한 러너라면 참가자격이 주어지는데 완주조건도 이에 부합하여 3시간 10분을 넘기면 공식 완주기록증을 발급치도 않을 뿐만아니라 완주로 인정하지도 않는 것이 또한 이 대회의 특색이다.
시기상으로 단지 이 대회에 참가하는 의미를 동마전을 위한 전초전으로 여긴다면 구태여 조건이 엄격한 서브-3대회 보다는 다른 여타의 대회를 선정하여 완주에 쫒기지도 않으면서 최선이 아니면 차선의 결과를 겨냥하여 경기페이스를 유지함이 훨씬 바람직하고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구태여 특히 엄격한 완주시간을 제한하는 대회에 참가함으로써 자승자박으로 스트레스를 가중하는 결과를 무모하게 도모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가능하면 고통을 피하고 적당하게 안일을 추구하는 성향이고 다른 하나는 쓰라린 고통을 통하여 자신의 한계상황을 극복함으로써 절차탁마의 기회로 거듭 나고자는 성향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부분 이런 두 가지 부류의 유사한 속성을 가슴에 지니면서 일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가령 운동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앞에 잘 차려진 진수성찬을 보고서도 양껏 채울 것인가 적당량으로 허기를 모면할 정도로 8할만 채우고 남겨둘 것인가 등 수많은 유혹과 갈등의 늪에서 합리적인 선택의 기로를 시험받게 된다.
솔직히 지금 나의 몸 상태나 주력으로 보면 서브 -3대회에 참가한다는 자체가 무리이고 모험이 아닐 수가 없다.
그것이 비록 서브-3에서 10분을 늦추어 완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부담이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싱글페이스를 유지하기도 말 같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키로당 4분 30초의 페이스를 끌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작년 서브 -3대회에서 강한 호기심과 모험심이 작용되어 역주하다보니 운좋게 완주의 영광을 얻었지만 그 후 일주일 후의 챌린져대회에서 3시간 여의 우중주을 하면서 왼쪽 종아리에 부상이 야기되어 지금까지 치료와 운동을 병행한 결과 95% 회복률을 보이고는 있으나 주력과 근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최소한 싱글대로 완주한다는 자체가 내게는 종전에 정상적인 컨디션을 유지하던 전성기에 서브-3를 달성함에 상응한 어려움에 비견되는 어려움을 자초하여 감히 다시 서브-3대회장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것은 ‘소는 대를 충족할 수 없어도 대는 소를 흡수할 수 있다’는 나름의 소신과 철학적 사고에 기인한 선택이다.
말하자면 작은 그릇으로 크고 많은 것을 담을 수는 없어도 큰 그릇으로는 작은 알갱이를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는 논리인 것이다.
악몽의 현시와는 달리 출발 40여분의 여유시간을 남기고 대회장에 도착하였다.
날씨는 맑고 화창한데 기온이 영하권이라서 (대회출발시각기준 영하 7-8도) 귓불과 손끝이 시리고 어깨도 절로 움츠러진다.
잠시 여유를 갖고 하늘을 우러러보니 겨울하늘 같지 않게 구름도 거의 없는데다가 청명한 가을하늘처럼 높고 푸른 창공을 향하여 똑바로 굴뚝에서 치솟는 연기가 바람도 거의 없음을 상징하고 있음이다.
한강변은 탁 트인 공간이라 상시 바람이 변수로 작용하여 후반체력 유지에 어려움이 많은 코스로 자타가 공인하는 바인데 바람이 전무하니 날씨가 약간 짜릿한 매서움이 있어도 몸의 상태만 정상이라면 최고기록 경신도 품어볼 만하다고 얼핏 스쳐가는 생각을 해본다.
참가자격과 완주제한 시간을 적용한 결과 참가자가 너무나 한적하여 적막강산이라 대회장이라기보다는 동호회차원의 장거리 회합장소이거나 동네 자그만 체육행사를 떠 올리게 된다.
이런 와중에서도 대회장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하여 이따금씩 확성기를 통하여 사회자가 구성진 넉살과 함께 마스터즈의 최고의 명품대회임을 강조하고 아울러 대회진행에 대한 유의사항을 목청을 돋구어 토해내지만 차가운 새벽기온으로 이미 자라목처럼 움츠러진 러너들의 자태를 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너도 나도 최고의 기량과 수준으로 검증을 받고 선택된 참가군 이라서 자율적통제와 질서에 순응되어 일체의 부수적인 의식진행이나 스트레칭을 위한 준비과정도 생략한 채 오직 지정된 시간에 각자 지정된 출발그룹위치에서 카운트다운 10의 동작을 헤아릴 뿐이다.
상위 기록순으로 5등분하여 출발위치를 달리하였는데 한 그룹을 이루는 공간이 마치 중형승용차 1대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여 a에서 e그룹으로 편성된 대열에서 나는 작년처럼 중간그룹인 c그룹에 할당되었다.
이제 드디어 출발시간이 박두하여 카운트다운에 들어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오늘이 내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는 카운트다운과 동시에 출발 메트를 지나서 다시 이 출밝메트(=결승메트)를 밟을 수 있도록 내 몸이 지탱될 것인지 아니면 제한시간 초과로 탈락의 고배를 마시며 비운의 패잔병의 수모를 안고 경기를 마감하여야 할지이다.
내가 내 몸을 이끌고 내가 경기를 조종하지만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경기결과가 두렵고 수치스럽기까지하다.
품은 마음과 욕심으로야 당당히 서브-3로 완주메달도 받고 멋있고 힘찬 질주를 표상하는 영광의 모습으로 결승메트를 밟을 수 있기를 희망해보지만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이고 그 결과를 현실로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내 그릇이 보잘것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과연 그 결과가 어떻게 재현될 것인가.
달리 말하면 어렵고 핍박한 가정경제를 무릅쓰고 힘들게 달려서 최소한 완주기록증이라도 받아내어 완주횟수를 추가하는 자그만 증표가 될 것인지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인생수련이라 자족할 것인가이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듯이 지금부터 3시간 후면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 결판이 날 것이다.
솔직히 이번에 이 대회에 참가를 하면서는 나름대로 다른 여느 대회와 달리 비장함과 심각성의 면에서 독특한 면모를 간직하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적어도 이번에 싱글대로 완주하지 못하면 동마에 출전을 포기함은 물론이고 (이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이고 다짐이다.) 집에도 들여놓지 않는다는 엄명이다.( 이것은 나의 아내이자 메니져인 엄명임.ㅎㅎ)
출발그룹에서 흩어지는 물결을 따라 천천히 나아가는데 그 어느 누구도 한결같이 약속이나 한듯이 서두르거나 조급함에 빠져서 오버페이스로 성급하게 나아가는 주자가 없다.
간혹 싱글대 기록표를 부착한 주자들이 분을 못이겨 미꾸라지처럼 요밀조밀 좁은 틈새를 헤쳐나가는 경우도 일부 목격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깊은 수심을 흐르는 물결처럼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마치 레일위를 규칙적으로 달리는 기관차의 대형으로 자동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이 놀랍기만하다.
앞뒤로 배번과 기록표를 부착하여 달리는 것이 이 대회의 특징인데 앞주자의 등에 붙여진 기록표를 바라보면서 달려야 하는 관계로 이는 또 다른 무언의 절서를 형성하여 상호간에 적정페이스 유지를 위한 자정역할도 하게 되는 점에서 이 대회의 좋은 장점이기도 하다.
거리표시는 매 5키로 단위로 표시되어 일정한 거리를 구획하여 다섯 번 돌아오는 코스이다.
한번 돌고 두 번 돌때 까지만해도 여전히 지루하고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지만 아직은 여력이 있는 상태라서 그다지 어려움이 없는데 2번 반을 돌아오면서 하프거리를 통과하니 그만 맥이 풀려버리는 것이 아닌가. (1시간 28분 50초)
이때까지는 그래도 내가 생각해도 대견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잘 달려왔다고 생각된다.
물론 작년에 정상적인 컨디션을 유지하는 기준으로 보면 같은 거리를 1시간 25분대에 통과한 것에 비하면 3분정도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 내가 당면하고 있는 최근 1년간의 몸 상태를 감안하면 최고수준의 상한가라 아니할 수가 없다.
이대로 남은 거리를 유지한다면 간신히 서브-3 문턱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만 이상할 정도로 기계에 맞추어 달리다가 조정장치가 풀려서 기계가 정지되는 것처럼 다리에 힘이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가슴도 먹먹하여 지금의 페이스를 유지하기가 버겁다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남의 다리를 빌어 달려왔더란 말인가?
도무지 내가 내 발로 달려온 것이 믿겨지지가 않는다.
얼마간은 악착같이 무리를 쫒아 달려보지만 한계상황에 부딧쳐 대열을 이탈하여 페이스를 늦추니 몸은 훨씬 해방감으로 편하고 좋은데 점점 안일한 페이스로 적응되다보니 제한시간의 여유에 구속되어 저승사자떼들이 압박해 오듯 까맣게 타들어가는 마음이 긴장이 되어 살갖을 꼬집어 페이스를 독려해 보지만 무력해진 다리는 요지부동으로 오히려 페이스가 더욱 다운되는 현상을 보이는듯하니 속수무책이다.
드디어 4번째 돌아오니 이제는 재발 그만 달리고 싶은 생각이다. (여기서 중도 포기하는 주자들도 아마 참가자의 삼분의 1정도가 됨직하다.)
남은 한번을 더 돌아온다고해도 제한시간을 넘기지 않을 확신이나 완주를 장담할 수 없으니 더욱 달리고 싶은 의욕이 반감되는 것이다.
더구나 몇 번씩이나 돌아왔던 거리를 반복하여 달린다는 것이 얼마나 지겹고 피를 말리는 역겨운 일인지 재삼 느끼게되고 특히 장거리여파로 체력적으로 이미 바닥이 드러난 상태에서 불투명한 완주를 위해서 막연히 다시 돌아야 하는 처참한 상황은 더욱 정신적으로도 인내의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라 더욱 감내하기가 어려워진다.
순간 마지막 5회전을 알리는 펫말을 100여미터 전방에서 발견하고 고민과 갈등이 된다.
‘여기서 경기를 포기할 것인가. 그대로 달릴 것인가.’ 여기가 출발점이면서 종착점이니 마음의 결정만 하여 정지하여 버리면 모든 것은 끝장이고 해방이다.
지금까지는 그 누구도 제한시간 시비로 제제를 하거나 포기를 종용하는 사람도 없다.
일견 짧은 시간에 머릿속에서는 번개같이 주판을 놓으며 독려를 해 보지만 파김치마냥 기진맥진한 몸 상태로는 도무지 싱글대로 돌아올 가망이 희박해 보인다. 결론은 끝까지 가보는 것으로 일단 잠정결론을 짓고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려보는 것이다.
지금 경기를 포기하면 무모한 고생을 줄여서 몸은 편할지 몰라도 경기가 끝난 상당시간이 지난 직후에는 틀림없이 끝까지 시도해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을 것 같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보기로 마음을 품고 달렸다.
최후의 승자는 마지막 결승메트를 힘차게 밟는 야심찬 러너이어야 한다.
자 가자, 마지막 결승메트를 향하여!
이 마지막 회전을 돌고나면 영원한 해방이며 상응한 휴식과 영광이 주어진다.
어둡고 침울한 오랜 지옥의 터널을 뚫고 광명의 서광을 품을 순간이 이제 기껏해야 삼십여분 후이면 결판이 나는 것이다.
이제까지 뜨겁게 헐떡거리며 벌렁거리는 가슴으로 달려온 것이 아깝지도 않는가?
내 사전에 혹독한 시련은 있어도 포기나 좌절은 결코 없다.
이런 저런 많은 생각과 최면으로 저벅저벅 보폭을 놓다보니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결승점이
시야 200여 미터로 압축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 드디어 굴욕적인 지옥의 터널이 끝나고 천당으로 이르는 무릉도원이 바로 저곳이다.
오직 완주의 열매만을 위하여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결승메트를 힘껏 밟으니 3시간 8분 51초로 계측이 되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