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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광장

그림 보러 가는 날, 방울 사러 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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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복진 작성일02-05-25 12:13 조회4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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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보러 가는 날, 방울 사러 가는 날.

얼레 ?
이-야 ! 이 양반 그림 좀 봐 ! 영희야 !

아침 조간신문에 실린 그림 전시회 안내를 보며
나는 다급하게 아내를 불렀다. 아내가 무언가 하고 다가왔다.
아들놈 젖은 바지를 널려다가 한 손에 철사 옷걸이를 들고서...

우리 오늘 오후, 인사동 갈까 ?
여기 이 작가 그림 전시회를 보고 , 오면서 고양이 방울도 사 가지고 오게...
찻집에 들러 차도 한잔 마시고......

이 작가의 그림은 아주 독특합니다.
내가 아주 좋아합니다

우리의 한지에 먹과 붓을 사용하여
노쇠한 할머니의 표정을 잔인하리 만치 사실감 있게 그려낸
그의 그림을 좋아합니다.

깊게 패인 주름들,
이가 다 빠져서 홀쭉하니 들어간 양 입 언저리,
동해의 거친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헝클어진 백발들...
낡고 헐은 희뿌연 안경 속 초점은 가까이를 보지 않고
먼 곳을 힘없이 응시해서 더 더욱 사실적인 그림들..

인간이 꽃보다 아름답고,
세월이 겹겹이 쌓여 차분히 내려앉은 쭈글쭈글한 그 주름이
분바르고 눈썹 붙인 젊은 여인보다 저렇듯 더 이쁜 것임을.....

나는 세월의 질곡을 감춤 없이 다 드러낸
인간의 벗은 모습 그대로를 좋아합니다
그러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가와 그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가뭄 끝에 쏟아지는 잠깐의 소나기 속에서
깨 모종을 하는 촌부,

작렬하는 칠. 팔월 태양의 뙤약볕에서
구멍 숭숭 뚫린 삼베 적삼을 입고 밭고랑을 메는 늙은 할망구..

구불구불 논두렁 잡초더미 위,
엄마의 살 부러진 분홍색 양산 밑에서
엄마 젖 빨다 잠들어
새곤새곤 잠든,

진흙 투성이 아기 엄마와 갓난 아이

이런 것들을 사실감 있게 그린 우리네 옛날 살림 언저리 그림들을
좋아합니다

그림 앞에 서서 보고, 두어 걸음 뒷걸음해서 다시 보고,
안경을 낀 체로 보고, 훌러덩 윗머리에 걸쳐놓고 벗은 체로도 보고.
가만 가만 앞 걸음, 다가서며 보고...
이 양반의 그림은 참으로 포근합니다.

벼 베고 난 후, 질펀한 논바닥에 난 수레바퀴 자국들.
조그만 그 곳 물웅덩이에 내려 비친, 넘어가는 노을 빛들...
이런 그림들은 나 자란 고향의 모습 그대로여서 정말 좋습니다

우리 두 내외는 오랜만에 잔잔한 기쁨을 맛보고,
이제 찻집으로 향합니다

가는 길에 길거리 좌판장수에게 조금은 두꺼워 무게가 나가 보이는
고양이 방울 두 개를 삽니다.

마라토너 시각 장애우의 곁 달림이로 같이 달릴 때
나의 왼손에 감고 흔들어 대던 방울 철사 끈이 떨어져 나가
새 방울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평균 보폭을 50 센티로 잡고 마라톤 전구간을 달리려면,
팔만 오천여 번을 흔들어 대니,
세 번의 출전으로 방울 철사 끈이 그만 떨어져 나갔습니다

새로 산 이놈은 좀 더 틀시럽게 생기어서 마음에 듭니다

아주 흡족해서
주머니 속에 넣기 전에 딸랑 딸랑 흔들어 봅니다
됐어, 이 정도면 ! 그리고 나서 또 한번 흔들어 봅니다......

찻집에 들어섭니다.

귀천,
이 찻집은 내부 공간이 다섯 평이 체 안되어 보입니다
찻집 주인이 다가와 따뜻하게 맞이해 줍니다
돌아가신 어느 시인의 미망인이지요.

두분 자리가 있긴 한데 덩치가 커다란 개가 옆에 앉아 있어서....
괜찮으시겠어요 ? 주인께서 우리 두 내외의 양해를 구합니다.

안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고 보니
이 개는 시각 장애우 보조견 이었고
끈을 잡고 모과차를 들고 있는 분은 스무 살이 갓 돼 보이는
시각장애 소녀이었습니다

조심스레이 말을 걸어 봅니다
말하는 도중 그 소녀 맹인은 습관적으로 손을 아래로 내리어
무릎 밑에 엎드려 있는 개를 확인하는데 그 모습이 우리 두 내외
가는 눈물샘을 자극합니다.

그 개는 카나다산 " 리트리버 " 라 합니다
국내의 모 대기업이 들여와 시각 장애우 들에게 지원해 준 것이라 합니다
영리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귀찮게 만지고,
금지된 먹이를 주고 해서 속이 상한 적이 많다 합니다.

택시를 탈땐 승차거부를 하는 운전자도 있다 하는군요.
장애인 복지법 36 조에 명시된 200 만원 벌금을
몰라서가 아니고, 잘못된 편견이라서 속이 상하다고 하더군요

내가 요즈음 새로이 눈뜨게된 시각 장애우들의 삶,
오늘은 무슨 인연으로 또 이 시각 장애우 소녀와 같은 자리에
앉게 되었을까 ?

보이지 않는 어떤 인연이 자꾸 나를 이끌어 가는 것 같아
잠시 숙연해 지기도 합니다.

시각 장애.
우리는 미처 느끼지도, 의도하지도 않고 하는, 할 수 있는 작은 동작을
그들은 평생 소원으로 염원하는 간절한 삶을 살고 있는 그들,

그들은 혼자 스스로 전철을 타고 광화문 앞으로 나가
세계 타악 연주를 보는 게 간절한 바램 일겁니다
붉은 악마와 함께 대형 전광판 위의 역동적인
축구 경기를 보는 게 평생 소원 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맘만 먹으면 숨쉬기 보다 더 쉬운 나들이 인데...
우리는 귀챦아서 하지 않는 일들이 그들에게는
평생을 두고 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입니다.

내 작은 힘이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
사회의 다른 편견과 싸워 보고 싶은 욕망이 가만히 떠오릅니다
내가 잊고 있었던 , 적은 힘이지만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앞에
조심스레 펼쳐지는 순간입니다

저렇듯 바로 앞, 우리의 형제, 자매에게도 할 일을 다 못하며
다른 나라를 구원한다고 출국 비행기 앞에서 큰 간판 들고
사진 남기며 떠나는 거창한 구호 단체 분들을 자못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두 내외는 그 시각 장애우 소녀의 옆에 앉아 있는,
20 대 후반 아가씨로 보이는 그 도우미의 잔잔한 설명에
귀가 기울여 집니다.

그 도우미 여성분은 나누시는 대화가 아주 조용하고 차분합니다
두 분 사이가 어떻게 되느냐는 아내의 질문에
조용한 미소로,

" 친구예요. 그냥 친구예요 " 라고 말하며 도우미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 말끝마다 얼굴 전체를 덮는 미소가 너무 좋아 보입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찌 어찌해서,
시각 장애우 마라토너 도우미라고 신문에 나고, 방송에 나고,
책에 나오고, 잡지에도 나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격이 돼버려 부끄러웠던 나의 지난 몇 달의 못난 행적에,
여지없는 직격탄이 떨어지는 순간입니다

그 여성 도우미, 아니 여성 친구 분과 시각 장애우 소녀의 조용한 대화가
나와 나의 아내의 귀에 흘러 들어옵니다
아니, 우리는 듣고 싶어 우리의 대화를 끊었습니다.

나와 아내는 서로의 손목을 꼬옥 잡고,
바로 옆자리 그들의 도란도란 대화를 들으며 코끝이 찡해옴을 느낍니다
봉사의 참 방향을 연설이 아닌 몸으로 구현하고 계시는 어린 그 여성분의
모습이 정말 훌륭해 보입니다.

방금 전 보고 온 그림의 감동을 훨씬 더 앞지르는 살아있는 명화의 실체를
보고 있습니다

그 여성분이 시각 장애우, 맹인 소녀에게 말합니다
그 소녀는 환한 웃음으로 그 뜻을 이해하고 있음을 나타내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이야기 끝마다,
한 손으로는 발 밑에 엎드려 있는 보조견 리트리버를 다시 쓰다듬으며,
여성 도우미, 친구의 설명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야기가 끝나면, 보이지는 않지만 잠깐, 잠깐 고개를 들어 이야기 주제의
위치를 고개로 더듬어 보고, 캄캄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을 더듬는,
보통사람 보다 약간은 더 높은 각도로 들려진 턱끝을 끄덕입니다.

" 응, 저기 문 입구 주방 탁자에 밤색 큰 항아리가 있어.
그 항아리에 하얀 꽃이 가득 있어. 아주 많아.
들국화 같은데, 누가 꺾어 왔나봐. 굉장히 큰 묶음이야.
꽃이 하얀 색이야 ! "

" 네, 들국화입니다. 꺾어서 가져다 놓은 지 얼마 안된 것 같네요.
아주 싱싱합니다. 들에서 자란 야생화지요 " 라고 내가 옆에서 거듭니다.

" 응, 네가 마시는 이 차는 모과차야 ! 색이 옅은 밤색이야 !
얼음 조각을 몇 개 넣었어. 점점 색이 옅어 지고 있어.
이 잔은 머그 잔이라고 하는데, 굉장히 투박하지 ?
좀 울퉁불퉁하고 겉이 거칠지 ? 색은 오래된 시골 마루 색깔처럼
진한 밤색인데, 중간 중간에 겨자를 물에 풀어놓은 것 같기도 해 ! "

잠깐의 설명인데도 그 어린 여성분의 설명은 시각과, 감각적인 것에
주안점을 둔 정말 훌룡한 설명임을 우리 두 내외는 알아차립니다

나와 나의 아내.
서로 잡은 손목에 힘이 점점 더 들어갑니다
오른쪽 주머니에 있는 두 개의 고양이 방울의 감촉이 나의 체온과 같아집니다.
적고, 크지 않은 감동이지만 우리 두 내외에게는 그 무게가 느껴집니다

찻집의 음악이 점점 더 감미로워 집니다.

아름다운 우리 나라 대한민국,
서울 인사동의 어느 작은 찻집,
우리 두 내외는 살아있는 명화를 옆에서 감상하고 있습니다.

인간만이 인간을 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그리고 그것의 위대함을, 비교할 수 없는 숭고함을 감상하고 있습니다.

서울
고덕 달림이
박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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