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연필 깎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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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광호 작성일02-05-17 16:28 조회52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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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래서 본의 아니게 소란을 피워 죄송하다는 뜻에서 잡글 하나 올립니다.]
"아~ 과장님, 이거요? 이상하게 깎은 연필이 하나 있더라 했네요."
25살 된 여직원 김모씨의 말이다.
지금은 연필을 모두 기계로 깎는다.
자연 누구의 연필이건 섞여 있으면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없다.
하루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연필 뒷부분을 깎는 거다. 연필심의 단단하기를 표시하는 글자인 HB라고 쓰여있는 부분을 깎자.'
기계가 아닌 손으로 깎는 습관은 오래되었으므로 뒷부분부터 깎아놓으면
내 연필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겠지.
그날 이후 내 연필은 혹시 옆 동료의 책상으로 잠시 외출을 갔다가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연필깎는 기계가 처음 나왔을 때 참 신기했었다.
처음 나온 기종은 손으로 돌려야하는 반자동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밀어 넣기만 하면 자동으로 드르르르...하고 단 몇 초만에
매끄럽고 예쁘고 긴 원뿔형으로 깎여 나오지 않는가?
나무도 대부분 향나무거나
아니면 적어도 재질이 매우 부드럽고 감촉이 좋은 것들이다.
오래 전, 초등학교 시절쯤이라면 특히, 연필을 잘 깎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첫째로는 칼 자체가 품질이 조악했으며,
둘째로는 연필나무의 재질이 나빴다.
부드럽게 깎이지도 않았지만 조금만 힘을 주면 턱! 하고 깡치째 덩어리로 떨어져 나가기 일쑤였다.
설상가상으로 연필심인 흑연도 단단하기만 하였지
도대체가 의도대로 순순히 깎이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장날 좌판에서 장사치들이 연필을 날카롭게 깎아 베니아판을 뚫어 보이면서
그 단단함과 오래 쓸 수 있음을 선전했으랴.
부모님들은 한 타쓰(더즌)에 얼마하는 그 연필을 한 주먹 던져주시며
한 학기는 너끈이 쓸 수 있을거라고 말씀하셨고.
겨우겨우 연필을 깎아 글이라도 쓸랴치면
아마도 저질 흑연으로 만들었을 연필심은 침을 듬뿍 발라도 검은색을 내지 못하고
오히려 공책 종이만 뜯어먹기 일쑤였었다.
난 그런 연필이래도 손재주가 있었던 탓인지 참 잘 깎았었다.
연필을 깎는데는 오른손과 왼손이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오른손은 깎여나가야 할 나무의 양을 어림짐작하여
정확한 곳에 알맞은 각도로 칼날을 가져다 대어야 하고
왼손은 적당한 크기의 힘으로 칼등을 밀어야 한다.
칼날이 닿은 곳의 간격이 너무 멀면 깎이질 않고
반대로 너무 촘촘하면 한 자루의 연필을 깎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칼등을 미는 힘이 너무 세면 나무가 덩어리째 떨어져나가기 쉽고
반대로 약하면 깎이질 않을 것이다.
이렇게 연필깎기는 두손의 조화를 필요로 한다.
식칼로 무껍질 깎아내듯이
오른 손만으로 쓱쓱 밀어대는 검법(?)이 아닌 것이다.
요즘 세대는 글씨를 잘 쓰지 못한다.
펜글씨 교본을 배울 시간에 키보드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탓이다.
쓰기 숙제보다 컴퓨터에서 자료를 찾고 인쇄하는 것이 많은 탓이다.
시각과 감성과 촉각과 판단력이 종합적으로 필요한 글씨 쓰기와
접촉만으로 충분한 자판치기는 많이 다른 것이다.
진즉부터 용도가 많이 줄은 연필마저도
필요할 때마다 자동기계 속에 쑤욱... 밀어넣는 것만으로 끝이므로
손가락의 촉감은 무뎌지고 손재주는 더 이상 발달되지 않을 것이다.
보석세공이나 양복재단 등 세계기능대회에서 단골로 메달을 따오는
한국인들의 손재주도 멀지않아 쇠락의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사무실 한 편에서는 드르르륵... 연필깎이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난 연필 뒷부분에 칼을 가져다 대는 것을 고집한다.
눈으로는 조금 고르지는 못하지만 자연스럽게 깎인 면들을 바라다보고
코밑에서 연필을 돌려보며 어릴 적의 향나무 냄새를 맡으며.
(2000.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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