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에서 내게 존재하는 신(神)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현우 작성일02-02-20 20:24 조회691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인간은 신(神)을 의지하고 싶어 하지만 신을 가장 두려워한다.
우리가 생활하다 보면 한계라는 상황에 부닥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생각하게 되는 것이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생각해낸 것이 신일 것이다.
신은 의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상을 넘고자 한다면 그것에 얽매여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그에 맞는 신을 스스로 찾아 헤매게 된다.
그 때마다 나타나는 것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좁게 한정지어진 옹졸함이다.
대학 입시를 눈앞에 둔 부모는 자녀가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든 안 하든
신에게 엎드려 공들인 경우가 흔하다.
많은 수험생들이 자기 자식과 같은 대학에 입학하려고 경쟁하고 있음에도
같은 입장의 다른 수험생들에 대한 배려는 별로 없고
어떻게든 오직 내 자식만큼은 꼭 그 대학에 붙게 해달라고 신에게 조르게 된다.
이때 학부모가 생각하는 신의 대상은
자연적인 형상물인 커다란 바위나 나무 일 수도 있지만,
소위 고등 종교라 하는 곳에서조차
대학입시 백일기도, 또는 합격을 위한 백일 새벽예배 등이 있다.
또한 자신의 앞날이 불확실하여 불안할 때
소위 신과 통한다는 예언가들에게 자신의 앞날을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스스로 어떤 일을 헤쳐나가기 어려울 때
연약한 마음에서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
게다가 요즘은 신문마다 오늘의 운세 난이 있어
심심풀이로 자신에게 해당된 사항들을 지켜보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불확실한 것에 대해 위안점을 찾고자 할 때
내면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지만
두려움에 대한 신은 노여움으로 나타나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조상을 잘 못 모셨기에 후손들이 벌받는다.
또는 신을 무시하는 행동을 했기에 당연히 그에 대한 응보를 받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신은 참으로 옹졸하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찌 자신에게 수 백번 조아리며 기도를 올렸음에도 그 뜻을 들어주지 못했을까?
또한 설령 자신에게 조금 섭하게 대했다손 치더라도
그래도 후손들인데 어떻게 잘못되도록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신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것을 포용하는 능력도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태초부터 두려운 존재로 시작된 신이기에 그것에서 벗어나려면
그것을 추종하는 사람이 두려워하지 말고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마라톤을 즐기면서 내가 느끼는 신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내가 잘 달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신은 내게 기쁨을 주면서
많은 사람들과 재미있게 어울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렇지만 나는 원래 무종교 적이기에 신 자체를 믿지 않는다.
내가 살아가면서 결정한 상황들에 대해 내 스스로 택했기에
그 책임과 영광은 내게 있는 것이지 보이지도 않는 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라톤도 역시 어느 누가 대회를 지정해주어 내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회를 선택해서 떳떳하게 대회 참가비를 내고 달릴 뿐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아무 거리낌이나 불평이 없다.
그렇기에 아주 정정당당히 자연 귀의적인 옷차림으로
거친 호흡과 더불어 땀방울을 쏟아내며 거리를 질주하는 것이다.
또한 누구에게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잘 뛰든 못 뛰든 내 능력 껏 달리면 그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에게 내가 잘 달리게 해달라고 공들일 필요도 없다.
그저 평소 훈련만 성실히 하고,
나 좋아서 달리면, 그에 대한 결과가 아주 정직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 내가 달릴 수 있도록
건강한 몸과 여건을 허락해주신 부모님과 사회에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마라톤에서 내게 존재하는 신은 감사할 줄 아는 즐거움이다.
송파세상 김현우
우리가 생활하다 보면 한계라는 상황에 부닥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생각하게 되는 것이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생각해낸 것이 신일 것이다.
신은 의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상을 넘고자 한다면 그것에 얽매여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그에 맞는 신을 스스로 찾아 헤매게 된다.
그 때마다 나타나는 것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좁게 한정지어진 옹졸함이다.
대학 입시를 눈앞에 둔 부모는 자녀가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든 안 하든
신에게 엎드려 공들인 경우가 흔하다.
많은 수험생들이 자기 자식과 같은 대학에 입학하려고 경쟁하고 있음에도
같은 입장의 다른 수험생들에 대한 배려는 별로 없고
어떻게든 오직 내 자식만큼은 꼭 그 대학에 붙게 해달라고 신에게 조르게 된다.
이때 학부모가 생각하는 신의 대상은
자연적인 형상물인 커다란 바위나 나무 일 수도 있지만,
소위 고등 종교라 하는 곳에서조차
대학입시 백일기도, 또는 합격을 위한 백일 새벽예배 등이 있다.
또한 자신의 앞날이 불확실하여 불안할 때
소위 신과 통한다는 예언가들에게 자신의 앞날을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스스로 어떤 일을 헤쳐나가기 어려울 때
연약한 마음에서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
게다가 요즘은 신문마다 오늘의 운세 난이 있어
심심풀이로 자신에게 해당된 사항들을 지켜보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불확실한 것에 대해 위안점을 찾고자 할 때
내면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지만
두려움에 대한 신은 노여움으로 나타나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조상을 잘 못 모셨기에 후손들이 벌받는다.
또는 신을 무시하는 행동을 했기에 당연히 그에 대한 응보를 받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신은 참으로 옹졸하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찌 자신에게 수 백번 조아리며 기도를 올렸음에도 그 뜻을 들어주지 못했을까?
또한 설령 자신에게 조금 섭하게 대했다손 치더라도
그래도 후손들인데 어떻게 잘못되도록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신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것을 포용하는 능력도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태초부터 두려운 존재로 시작된 신이기에 그것에서 벗어나려면
그것을 추종하는 사람이 두려워하지 말고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마라톤을 즐기면서 내가 느끼는 신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내가 잘 달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신은 내게 기쁨을 주면서
많은 사람들과 재미있게 어울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렇지만 나는 원래 무종교 적이기에 신 자체를 믿지 않는다.
내가 살아가면서 결정한 상황들에 대해 내 스스로 택했기에
그 책임과 영광은 내게 있는 것이지 보이지도 않는 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라톤도 역시 어느 누가 대회를 지정해주어 내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회를 선택해서 떳떳하게 대회 참가비를 내고 달릴 뿐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아무 거리낌이나 불평이 없다.
그렇기에 아주 정정당당히 자연 귀의적인 옷차림으로
거친 호흡과 더불어 땀방울을 쏟아내며 거리를 질주하는 것이다.
또한 누구에게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잘 뛰든 못 뛰든 내 능력 껏 달리면 그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에게 내가 잘 달리게 해달라고 공들일 필요도 없다.
그저 평소 훈련만 성실히 하고,
나 좋아서 달리면, 그에 대한 결과가 아주 정직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 내가 달릴 수 있도록
건강한 몸과 여건을 허락해주신 부모님과 사회에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마라톤에서 내게 존재하는 신은 감사할 줄 아는 즐거움이다.
송파세상 김현우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