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 잔디에 누워 하늘을 보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우광호 작성일02-05-25 14:38 조회504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작년 어느 토요일... 런클에서 토달에 딱, 한번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적었던 글인데,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꾸물꾸물하고,
잠시 머리를 식히려고 옛글들을 뒤적이다가 올려봅니다.
허창수님... 오늘 통화 반가웠네...
***********
토요일...
지난 일주일간 여러가지 일로 머리속은 복잡하기 그지없다.
세상에,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새삼스레 또 부러워진다.
모두 다 잊고 싶었다.
요즈음은 '주말인데 뭐 하십니까? 같이 운동이라도 하실까요?' 이런
순전히 인사치레성 말마저도 귀한 세상이 되었다.
토요일...
2시40분까지 여의나루 3번 출구.
참 Runner's High까지야 바라지 않는다 하더라도
달리는 동안만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않는,
무념으로 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바이킹님을 만나러 간다.
아내는 머리가 아프다.
엊그제 아내가 말했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병원을 찾는데 동네의 신경외과는 모두 문을 닫았더라고요.
그래서 한 군데 열린 신경정신과를 찾아갔거든요?'
가끔씩 아내는 격렬한 편두통으로
잠을 자지 못하고 눈물을 찔끔거리는 고통을 겪고는 한다.
'그랬더니 세상에... 벼라별 걸 다 묻더라고요.
성격부터 태어나서 살아온 얘기 전부를 자세하게 얘기해야 하고,
또 당신도 함께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데요?'
마음이 뜨끔해왔다.
아내를 만난 이후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던가...
'머리가 아파 죽겠으니 그런 원인은 따지지 말고 약이나 좀 주세요,
지금 당장 아파 죽을 지경이니까...'했다한다.
아내는 또
신경외과는 아픈 것을 치료하는 곳이고 신경정신과는 아픈 원인을 탐색하는 곳이라고 하며,
'...누가 그런 걸 모르나? 아픈 원인이 스트레스라는 것...
하지만 그 스트레스의 원인이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 그렇지...' 하며
힘없이 피식, 웃었다.
그렇다. 그 해결할 수 없는 원인이 바로 남편인 것이다.
더 정확히는 함께 살아오며 남편 때문에
16년간 켜켜이 누적되어온 스트레스...인 것을 왜 내가 모르겠는가.
사무실에서 여의도로 출발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집에 전화를 했다.
'응, 난데...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좀 나와봐라, 응?'
두어 시간 전에 청했을 때 아내는 머리도 아프고 움직이기 귀찮다고 완곡한 말로 거절했었다.
'한강 바람도 좀 쐬고, 한강에 사람들 많이 나와 놀거든? 아이들 데리고 좀 나와 봐...'
'얼굴도 그렇고... 나가기 싫은데...'했지만
거듭되는 권유에 마지못해 나오기로 약속을 했다.
2시40분에 도착한 여의도에는 바이킹님을 비롯한 많은 LSD를 준비하는 분들이 옷을 갈아입고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본부석은 올 봄 생각하기도 싫은, 서울마라톤대회의 본부석이 있던 곳으로
바로 그 곳에서 자원봉사를 위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정말 지옥이라면 지옥이랄 참담함을 느꼈던 바로 그 자리여서 잠시 다른 생각이 들었다.
한강관리본부에서 옷을 갈아입고 연신 지하철역 입구를 바라다보아도
아내는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15시 정각.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대신 휴대폰을 들고 무리를 따라 출발 했다.
선선한 날씨는 벌써 언제 폭서가 있었냐는 듯,
저만치 가을이 오고있다는 느낌을 갖게하기에 충분하였다.
63빌딩을 지나는 지점에서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응, 나 출발했거든? 런너스 클럽이라고 현수막 붙인데 보이지?
그 근처에서 쉬고 있어. 아이들 먹을거도 좀 사주고, 알았지?'
홀가분한 마음으로 8명 정도서 그룹을 이루어 여유있게 달렸다.
30km를 목표로, km당 6분내지 6분30초 정도를 유지하겠다는 게
오늘의 페이스메이커 바이킹님의 계획이었다.
힘이 든다는 것을 잊을 수 있는 길은 침묵속에 무념무상으로 드는 것도 있지만
좋은 사람들과 적당한 대화를 나누면서 달림으로써
다른 생각이 들 여유를 주지 않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달리면서 무리지어 구령을 붙이거나 얘기를 나누는 것을 사실 싫어했었다.
철저하게, 고독한 레이스라는 마라톤에 걸맞게, 침묵속에 혼자만의 명상을 하며
달리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앞으로도 그런 내 믿음은 쉽게 변하지 않겠지만
오늘처럼 좋은 사람들간에 좋은 기분으로 이런 저런 정겨운 얘기들을 나누며 달리는 경우라면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꾸준히 페이스를 유지하여 9km 500m 지점의 휴게소에서 물을 사 마셨다.
1분 정도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출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연습을 하지 못해온 나는 무리를 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저는 여기서 돌아서겠습니다. 잘 들 다녀 오십시오'
11km 푯말이 서있는 성수대교 지점에서 작별을 하고 돌아섰다.
시각은 출발 후 1시간 07분이었다.
돌아 오면서 이런저런 혼자만의 생각들을 했다.
옛 말에 그른 말 없다고, 40을 넘긴지 몇 해가 되어가니
옛 어른들의 말씀들이 의미가 깨달아지는 경우를 느낀다.
예를 들지는 않겠지만
왜, 어느 날 문득, '맞아, 바로 그 뜻이었어...'하고 무릎을 치거나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기지 않던가.
정식 풀 코스를 3번 완주했고 그보다 몇배 수의 하프를 완주했지만
오늘도 역시 보통 힘이 드는 게 아니다.
걷다 쉬다를 몇 번 반복하였다.
누가 그랬다.
'풀코스 뛰었으니, 하프 정도는 식은 죽 먹기겠네, 뭐?'
적절한 해답을 찾다가 마침내 나는 이런 답을 만들어 내었다.
'알피니스트가 에베레스트 올랐다고 해서 로체나 좀 낮은 5,6천 고봉들을 우습게 보는 것 봤어요?'
또는, '한 번 올랐다고 해서 다음 번에 조난당하지 않는다는 보장 있어요?'라고.
출발점에 도착하니 2시간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반겨주는 연제환님을 비롯한 런클회원들의 격려속에 물을 마시면서도
연신 눈을 이 곳 저곳으로 돌렸다.
아내와 아이들이 내 들어올 시간을 모르니 어디 멀리있나보다...생각하는 차에,
유치원 막내가 달려와 '아빠!' 하면서 무슨 풀을 한 줌 던져주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그게 아이가 내게 환영으로, 수고했다고 던져준 꽃다발,
토끼꽃 한 웅큼이었다.
화채를 두 그릇 먹었다.
흔히 사람들이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것은 처음이야...'하는 그 상투적인 표현 말고는
이런 경우를 더 이상 적절하게 표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바로 이 순간이었다.
가까이에서, 아주 사소한 내용도 깨달음은 깨달음일 것이다.
보리수 나무 아래에만 깨달음이 있는 것은 아니며
중생을 제도하는 것만이 그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막내아들이 던져주는 토끼풀꽃이 월계관보다 감격스럽고
동료가 자원하여 직접 타 준 수박화채가 천하일미인 것도 모두 눈물겹도록 소중한 순간인 것이다.
막걸리까지 두 어 잔 얻어마시고 잠시 환담을 나누다 아내를 만났다.
큰 아이들, 중3과 초등 6학년은 다 제 약속이있다하여 막내만 데리고 왔다.
바이킹님과 아내를 인사나누게 하고,
피곤하다는 아내를 반 강제로 한강변쪽으로 앞세웠다.
맥주 한 캔과 컵라면 하나, 김밥 한 줄을 샀다.
'얼마 줬어요?'
아내의 관심사다. 당연히 바가지에 대한 염려일 것이다.
'응, 5,200원. 내 생각에는 3,500원 정도가 정상가격일 것 같애'
'그렇네? 그렇게 바가지는 아니구나...'
음식을 나누어 먹고 돗자리에 누웠다.
하늘에는 구름들이 천의 얼굴 만의 모습으로 변화하며 흘러가고 있었다.
'치수 아빠는 이렇게 누워서 하늘 본 적 있어?
나는, 내가 이렇게 하늘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아내는 말했다.
'글쎄...나는 자주는 아니지만 그런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슬그머니 아내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때, 머리 좀 낫니? 다 나땜에 그런 거, 내가 잘 알아.
하지만 앞으로는 다 잘될거야...'
'......'
주변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만의 세상을 즐기고 있었다.
뭘 좀 더 사기로 했다.
이 번엔 병맥주 한 병과 오징어, 그리고 감자칩을 샀다.
'맥주 한 모금 해봐, 시원해서 맛있다?'
'싫어, 지난 번에 당신 말 듣고 마셨다가 머리 아파 죽는 줄 알았잖아.'
그래도 마지 못해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나란히 누워 하늘을 보았다.
이미 조금 전에 있었던 모든 구름들은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모습들의 구름들만으로 180도 다른 세계가 이루어져 있었다.
누구 눈치를 볼 생각도 하지않고 슬그머니 아내의 팔을 끌어다 베었다.
아,
그동안 충실하게 살아왔었더라면 지금 얼마나 여유있게
이 정경을 음미할 수 있었을텐데...생각했다.
하늘을 보니 순간변화하는 구름들이 교차하는 내 만감처럼 왔다가는 사라진다.
막내는 널푸른 잔디위를 뛰어다니고 있고,
아내는 잠시 침묵하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2001. 8. 12 )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