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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달리는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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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영무 작성일04-03-21 20:23 조회2,8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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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5

새벽 5시 반. 아내의 휴대전화 모닝콜 벨소리에 잠을 깼다. 납덩이 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일어나선 크게 하품 한 번 한다. 아직은 어린 세 살 딸아이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방문을 닫은 후 몽롱한 정신에 주섬주섬 운동복을 차려입고, 10여분간의 스트레칭을 마친 다음 현관문을 나선다. 인적 없는 고요한 길거리엔 주황색 가로등만이 제 밝기만큼의 어둠을 밀어내고 있다. 영하 2도. 겨울 새벽치곤 그리 차갑지 않은 기온에 바람도 잦아들어 포근함마저 느껴진다. 그래도 겨울은 겨울인지라 모자를 귀까지 덮어쓰곤 한발 한발 가볍게 뛰어본다. 가끔 마주치는 두꺼운 외투 차림의 행인과 어디론가 달려가는 트럭들을 마주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든 이 시간에도 서둘러 하루를 시작하는 부지런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흐뭇하기만 하다. 동네 어귀를 지나 대로변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오르며 거친 숨을 몰아쉬다 길 건너 반대방향 내리막길에선 호흡을 가다듬는다. 근 20여분을 달려 도착한 대학교 운동장엔 벌써 여러 아저씨, 아주머니가 운동장을 돌고 있다. 팔뚝에 찬 MP3에선 John Lenon의‘Imagine'이 흘러나온다. 이 고요한 시간에 이렇게 평화로운 음악을 들으며 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저 멀리 야트막하게 동이 터올 때면 옷이 흠뻑 젖은 채로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나에게는 아침이면 가야할 직장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달리는 진짜 이유

오랜만에 친구나 친지들을 만나거나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다 내가 달리기를 좋아하고, 마라톤 대회에도 몇 번 출전한 적이 있다는 말을 하면 운동과는 거리가 있어 뵈는 통통한 외모 때문인지는 몰라도 잘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거나 아니면 재미있게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운동도 많은데 도대체 뭐하러 그 힘든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내가 좋아서 뛰는 건데. 왜 뛰는 거지? 건강을 위해서...아니면 남들에게 뽐내기 위해선가?) 사실 내가 왜 뛰는 지에 대해서는 곰곰이 생각해 본 일도 없고, 생각해 본들 내가 더 달리기를 잘 할 수 있다거나 신통한 답변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달리기가 내 삶을 더욱 풍요롭고, 신선하게 만드는 활력소가 된다는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달리기는 지루하고 일상적인 내 생활을 특별하고 재미나게 바꾸어 주는 재미있는 놀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 종일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를 마주보고 키보드나 두드리며 마치 식물인간처럼 지내야 하는 나의 일상은 정말 끔찍하리만큼 지루하고 재미없다. 다람쥐가 챗바퀴를 돌리듯이 나의 생활도 반복과 반복의 연속이다. 하지만 유니폼같은 양복을 벗어 던지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뛰쳐나가면 내가 평소 다니던 운동장이나 공원이나 거리의 아스팔트가 사자가 어슬렁거리는 야생의 초원이 되고, 야자수 늘어진 멋진 해변이 되고, 때로는 매서운 폭풍이 휘몰아치는 시베리아의 벌판이 된다. 감히 말 하건데 달리기는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느끼지 못할 삶의 비타민이요, 청량제다.

100년만의 눈

서울 마라톤 대회는 지난해에 처음 참가하여 매우 좋은 인상을 받았다. 클럽에서 준비하는 대회답지 않게 규모도 크고, 행사를 주관하시는 분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정성과 열정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골인지점에서의 환대는 주자로 하여금 감동받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결국 금년에도 대회참가 신청을 접수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참가비를 입금했다. 새벽시간과 휴일을 이용하여 틈틈이 연습하고 하루하루 대회를 기다리던 중 대회를 사흘 남기고 갑작스런 폭설과 추위로 3월 7일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눈으로 덮인 주로를 뛴다는 것과 영하 7도의 날씨에 강바람을 맞으며 뛰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아무리 달리는 것이 즐거운 사람일지라도 고통스럽고도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대회 관계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의 각별한 노력으로 당초계획대로 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이다. 비록 춥기는 하겠지만 얼마나 기다려온 대회인데. 대회 출전의 투지를 마음속으로 다지며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이면 드디어 손꼽아 기다리던 대회일이다.

처음으로 하얀 눈 쌓인 한강변을 달리다.

알람 벨소리에 잠을 깼다. 풀 코스 출발시간은 11시이고, 집은 대회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포인지라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아내가 정성껏 마련해준 찰밥을 적당히 먹고, 샤워를 한 다음 어제 저녁에 챙겨놓은 옷을 하나씩 입고, 멋진 대회 기념 티셔츠 앞자락에는 참가번호도 달았다. 아내와는 내가 결승선에 들어올 예상시간에 맞추어 만나기로 하고, 얼마 전 새로 산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일기예보대로 바람이 매서웠다. 여의나루역내에는 추운 날씨 때문인지 많은 달림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 대부분 달리기나 오늘 대회에 관한 이야기들일 것이리라.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그 위에 보온용 비닐을 입었지만 그래도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출발 10분전. 주자들 사이에서 바람을 피하며, 마음속으로 완주를 기원해본다. 사회자의 구령에 맞추어 모두가 카운트 다운을 외친다. 셋, 둘, 하나... 드디어 출발이다. 길 양 옆에 늘어선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가볍게 발걸음을 뗐다. 목표는 4시간 30분. 그러나 그건 단지 목표일뿐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다. 주로 옆 잔디밭에 쌓인 눈만 아니라면 언제 눈이 왔는지도 모를 만큼 제설작업은 깔끔하게 잘 되어 있었다. 바람도 등 쪽에서 불어 추운 날씨임에도 오히려 심적인 부담은 적었다. 10분여를 달리자 슬슬 땀이 나기 시작했고, 5km지점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 보온용 비닐을 벗었다. 일주일동안 푹 쉰 터라 다리에는 힘이 넘쳤다. 주위에 함께 달리는 사람들은 모두 처음 보지만 달린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왠지 마음이 잘 통할 것 같다. 10km지점인 동호대교 근처를 지나 잠실 종합운동장까지 오자 배가 고팠다. 에너지 바와 음료수를 마시고 다시 뛴다. 여기서부터는 옆바람이 부는 것 같다. 약간의 피로감을 느끼며 반환점을 통과했다. 2시간 3분. 이정도면 목표달성이 가능할 것도 같다. 마라톤 대회에서 처음 먹어보는 순두부가 정말 따뜻하고 고소했다. 허기진 배를 달래고 약간의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후 다시 시작이다. 마주 달려오는 주자들에게 가볍게 손 인사를 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초반의 등바람은 이제 맞바람으로 바뀌어 나의 진로를 방해했다. 모자를 끌어내려 귀까지 덮고, 조금이라도 바람을 피할 양으로 사람들과 한 무리를 이루며 달렸다. 다리는 좀 뻣뻣해졌지만 그래도 아직 갈 길은 많이 남아있다. 오던 길을 거슬러 32km지점에 도착했다. 이제 몸은 점점 추워지고, 서서히 내 몸속의 에너지가 고갈되어가는 느낌이다. 다시 힘을 내어 달리기 시작한다. 주위 사람들도 지친 표정이 역력하다. 도대체 무엇이 힘든 저들을 뛰게 만드는 것일까. 35km. 왼쪽 발목에 적신호가 들어왔다. 삔 것처럼 복숭아뼈 부근 발목이 아파왔다. 걷기도 힘들 정도다. 아. 마라톤 완주는, 목표기록 달성은 여기서 물거품이 되는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계속 걸어야만 했다. 한 500여 미터를 걷다가 살살 뛰어보니 아프긴 했지만 참을만했다. 목표시간 까지는 45분 정도가 남았지만 이 상태로는 자신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뛰고 또 뛰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건 정신력뿐이다. 결승점에서 남편을, 그리고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아들, 딸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한강철교를 지나 63빌딩 앞까지 왔다. 목표지점은 점점 가까워오고 사람들은 점점 많아진다. 길가의 응원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마지막 힘을 냈다. 드디어 골인. 4시간 41분 46초. 온 몸은 고통으로 괴롭고 두 다리는 아파도 마음만큼은 행복했다. 비록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만족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기나긴 여정을 위해 마라톤 출발선상에 서면 나는 언제나 두렵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완주 후에는 삶에 대한 희망과 자신감으로 바뀐다. 매서운 바람과 눈을 견디며 겨울을 지내고 난 매화가 눈부신 꽃을 피워내듯이... 그것이 내가 달리는 진짜 이유 중의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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