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날씨 탓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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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석산 작성일04-03-12 14:06 조회2,73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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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흘리지 말아야할 것이 눈물만이 아닙니다.'
어느 휴게소 화장실에서 본 문구입니다.
남자는 왜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할까 생각해 보니 참으로 딱하다 싶습니다.
남자로 태어나 울고 싶어도,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한다는 선입관 때문에 감히 울지 못해 왔습니다.
화장실 카피 문구가 아주 그럴 듯해 보인 것은
바로 그 선입관이 저의 뇌리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세 번 정도는 허용했습니다.
태어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죽을 때 정도는 울어도 된다고 합니다.
물론 약간의 변형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울지 말아야 합니다.
정신 의학적으로 스트레스가 쌓이면 푸는 방법으로
제시되는 것 중에 하나가 우는 행위입니다.
실컷 울고 나면, 속에 쌓인 것이 말끔하게 씻겨 나갑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울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은 우는 사람에게 편안하게 울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울지 못하게 막는다면, 완전한 정리가 되지 못하여 가슴속에 앙금이 되어 남습니다.
의학 용어로 구태여 말한다면, 어떤 행위를 통해 마음을 정리하는 것을,
정화작용(카타르시스)이라고 합니다.
울지 못하는 자, 정화되지 못하는 자 그는 힘이 듭니다.
울어야 할 상황에서, 스스로 자제하여야 하기에 견디기 힘듭니다.
그래서 또 다른 돌파구를 찾아야 합니다.
터질 것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를 잘 단속해야 합니다.
이럴 때는 그의 감정을 다른 곳으로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그 것을 전환이라고 합니다.
서울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면서,
저는 정화작용을 하지 못했습니다.
몇 가지 정황이 저에게 무척 힘든 레이스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대회를 연기하면 어떤가?'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시 대회 전 날씨는 예측불허, 심각하게 보일 정도의 상황이었습니다.
추위와 바람까지 예상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완주하는 데 별다른 요건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 동안 숱한 대회 참가 및 달리기 생활 등으로 어떤 조건 하에서도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가벼운 부상이나, 기상 기후 조건 어떤 것도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다만 여러 가지 조건들이 겹치지 않는다면
완주하는 데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오히려 가벼운 부상이 있을 때, 그 나름대로 레이스 요령까지 익히고 있었습니다.
추위나 더위에 대비하는 방법도 알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평상시보다 무조건 천천히 달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 때문에 외부 조건이 좋지 않은 서울 마라톤 대회에 적응 요령은,
즉 레이스 요령은 우선 평상시보다 천천히 달리는 것으로 하면 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제게는 대회 참가 몇 주전 가벼운 부상이 있었습니다.
2월 1일 고성 마라톤 대회에 참가 후,
그 다음 주 일요일에 동네에서 44km 달리기를 하였습니다.
왼쪽 무릎 뒤가 뻐근하였는데 그리 심하지 않은 것 같아 무시했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아주 잔 고장이 심각한 결과를 만들 수 있음을 무시했습니다.
근육 부위의 긴장상태로 판단이 되어 가벼운 조깅은 계속했습니다.
중거리 이하에서는 크게 불편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2월 29일 충주 마라톤 대회에서 하프 이하에서 통증이 왔으나 완주를 했고,
완주 시간도 평상시와 같은 정도였기에 안심을 했습니다.
서울 마라톤 대회를 대비해 나름대로 전략을 짜기로 하였으나,
부상보다도 추위가 제겐 더 큰 문제로 부각이 되었습니다.
저는 느린 주자입니다.
느리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소모되니 에너지 고갈을 느끼게 됩니다.
다른 분들이 완주선에 들어가더라도,
아직도 많은 거리를 달려야 하는데 에너지 고갈이 옵니다.
날씨가 추우면 더 느려지고, 에너지 손실이 많아집니다.
근육이 굳어지고, 그 것을 풀어 보려면 에너지 손실은 더 많아집니다.
그런 것을 알고 있기에 최대한 방한에 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반환점을 되돌아오면서 왼쪽 무릎의 통증이 심해졌습니다.
가뜩이나 느려진 몸에, 맞바람을 맞으면서 더욱 느려졌고,
느리게 움직이니 열이 제대로 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30km 지점까지, 한 시간이 훨씬 넘게 부분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몸을 이끌며 달렸습니다.
제 경험으로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천천히 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걷다 보면 의지력의 약화보다는 열의 발생이 제대로 되지 않아 몸은 더욱 제멋대로 됩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생기게 됩니다.
차라리 포기하지 왜 달리느냐 물어보실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경우에 가능하면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달리려는 의지가 중요하며, 느리더라도 계속 달리면,
어딘가 숨어 있는 곳에서 에너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경험이 없다면,
매번 달릴 때마다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 쉽게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포기하는 자에게 그리 관용을 베풀지 않습니다.
더불어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 준엄한 심판을 내립니다.
저는 항상 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관용을 받곤 합니다.
살아가는 데, 힘들 때마다 버텨나갈 정신력을 얻었다는 것만큼
큰 관용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상한대로, 30km가 넘으면서 차츰 열이 나고 달릴 만 해 졌습니다.
무릎은 그리 편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함으로 다음을 기대하는 것보다는
최소한의 충격으로 달리는 방법을 선택하여 달렸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자꾸 가면서 마음을 헤집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가면 상당히 시간이 지체될 텐데 하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빨리 달릴 요량을 벌이는 몸에게 스스로 말했습니다.
'아서라. 아서. 네가 달리는 이유는 행복하고자 하는 것이지
무조건 빨리 달리자는 것이 아니다.'
저 스스로 딜렘마에 빠지게 될 때-
빨리 가야 하는가? 천천히 가야 하는가?-
순간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니, 차라리 울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울지 못했습니다.
남자에게는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그 문구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내 몸을 주체하지 못해,
배출되는 뇨를 흘렸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데,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한다는 억지 춘향같은 고집 때문에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파란 하늘이 있었습니다.
4시간을 넘게 달리면서 그 파란 하늘을 보지 않았었습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잊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주변의 훌륭한 경치를 보고, 달리는 과정 속에 오는 힘든 상황을 극복해 낸다는 것,
그 것은 주변 경관이 좋은 서울 마라톤 대회 코스의 장점일 것입니다.
그 것을 뒤늦게 생각해 냈으니 그만큼 힘든 레이스를 한 것입니다.
마지막 2km가 남았을 때, 자원 봉사로 나오신 삼성 서울 병원의 이 장호님이 달려오십니다.
몇 십 미터를 같이 달려 주심으로, 마지막 힘을 실어 보았습니다.
권 선화 - 이 장호 부부, 두 분 외에도 각 구간마다 힘이 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신 많은 분들의 얼굴이 스쳐갑니다.
풀뿌리 마라톤이 되고자 노력해 온 서울 마라톤 대회.
누가 날씨 탓을 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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