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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고통 짧은 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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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진걸 작성일03-11-11 21:10 조회3,1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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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고통 짧은 희열(혹서기 후기)



혹서기, 가장 날씨가 더운 시기라는 의미의 이 말만 들어도 사람들을 우선 두 어깨가 축 처지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아도 더위에 시달린 끝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더운 때라니 찌는듯한 더위를 피해 어디 쉴 공간을 찾고 싶은 마음 뿐일 것이다. 헌데 이 혹서기에 오히려 장시간 햇볕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 마라톤 대회라니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더구나 마라톤이라는 이름 하에 달리기 시작한지 그렇게 오랜 세월도 아닌 본인과 같은 초보자의 입장에서는 망설임의 세월이 오래 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허나 진정 마라톤을 사랑한다면 한번쯤은 도전해볼만한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급기야 참가를 결정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대회가 가까와 올수록, 대회당일의 날씨가 그 어느 해보다도 무더울 것이라는 예보를 듣게되면서 또한 여느 대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많은 언덕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밀려드는 걱정은 태산과도 같았다.



대회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이러한 온갖 생각에 짓둘려 한층 무거울 수 밖에 없었다. 허나 일단 대회에 참가하기로 한 이상 최선을 다하리라, 그러나 결코 무리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니 마음은 오히려 홀가분해지고 있었다. 아울러 전국의 내노라 하는 달림이 강호들과 자리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미치자 마음은 더욱 여유로워지고 있었다.



처음 달려보는 코스이며 수 없이 도사린 언덕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생각은 내딛는 걸음을 조심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맨 후미에서 천천히 내딛는 발걸음은 그저 앞서 나가는 주자들을 뒤쫓으면서 주로의 지형지물을 탐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치 처음 가본 곳을 겁먹은 표정으로 이리저리 살피듯하였다. 1KM 조금 지나 있는 언덕도 결코 쉽지만은 않았으며 4KM 지점부터 이어진 긴 언덕은 오늘의 레이스가 결코 순탄하지 않으리라는 느낌을 갖기게 충분하였다. 중간 중간 있는 급수대에서 조금씩 목을 축이며 이루어진 첫바퀴는 그저 완주만으로도 오늘의 레이스는 그 의미가 충분하리라는 결론에 이르게 하고 있었다. 완주 여부는 네바퀴를 달리고 난 다음에 결정하기로 하였다.



언덕 이외에는 관심이 두어지지 않던 첫바퀴와는 달리 두번째 바퀴부터는 시야를 다소 넓힐 수 있었다. 중간 중간 위치한 자봉님들이며 샤워대며 급수대에 그득한 먹거리들에게도 눈길을 돌릴 수 있었다. 우거진 숲과 그늘은 높아져만 가는 수은주를 한동안 느낄 수 없게 하였다. 1km 지점 조금 지나 언덕 초입에서 외쳐대던 격려의 함성, 2km 지점에서 마이크를 통해 울려퍼지는 낭랑한 소녀의 목소리, 4km 지점에서 건네주는 쭈쭈바, 6km 지점에서 온 몸을 흔들어대던 아주머니의 율동 이 모든 것들에 여유로운 눈길을 보내며 네바퀴를 돌았다. 이것만으로도 오늘 이 대회에의 참가는 충분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었다.



이제 예서 그만둘 것인지 내친김에 완주를 할 것인지를 결정하여야만 하였다. 처음 같이 달리던 동료들은 이미 앞서거나 뒤쳐져서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홀로이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마라톤은 혼자하는 것이며 자신과의 싸움이 아니던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한 바퀴만 더 달려보기로 하였다. 평소 언덕 훈련이라고는 남산에서 행한 두번의 경험 밖에는 없는 본인으로서는 4KM 지점에서 길게 이어지던 언덕을 생각하면 도무지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이미 달려온 수많은 언덕으로서도 힘에 겨웠던 것이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에는 언덕은 걷고 평지와 내리막길은 뛰기로 마음먹고 다섯바퀴째를 향하였다. 잠시 쉬어서일까? 내딛는 발걸음이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다리의 근육도 당기는 것 같았고 무릎에도 통증이 오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동안 그늘에 가려 느끼지 못하였던 더위가 온 몸을 감싸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장시간 장거리를 달린 탓이리라. 곳곳에 설치된 샤워대에서 찬어름물을 머리에 뒤집어 쓰기도 하고 온 몸을 적시기도 하면서, 또한 빠지지 않고 급수대에 놓인 갖가지 먹거리로 허기를 채우면서 그렇게 다섯바퀴째를 마치고 나니 발걸음은 이미 마지막 바퀴째에 접어 들고 있었다.



네바퀴를 달리고 난 다음과는 달리 아마도 마지막바퀴라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음에 따른 것이리라. 그러나 얼마전부터 느껴지던 근육의 이상 징후는 급기야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채 500M도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근육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동안 다리를 이리 저리 주무르고 난 다음 천천히 달려보고 근육이 튀틀리면 또 주무르고 하면서 마지막 반환점을 돌아 여지껏 활기찬 소녀의 함성을 뒤로 한 채 마지막 4KM를 향하였다. "깔닥고개" 초입에서 건네주던 쮸쮸바의 찬기운에 정신을 가다듬으며 중간에 위치한 천달사님의 물세례로 원기를 회복해 가며 그렇게 마지막 고개를 힘들게 올랐다.저 앞에 보이는 골인지점을 향해 마지막 힘을 다해 보나 마음과는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골인지점 직전에 옆을 스치는 주자의 오른쪽 다리가 여러갈래의 핏줄기가 선연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마도 근육경련을 이겨내고자 바늘같은 것으로 찔렀으리라 짐작되었다. 오늘의 이 레이스가 얼마나 힘들었던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참으로 기나긴 인고의 시간이었다. 어느 대회에서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달리는 순간의 수많은 고통은 골인지점의 매트를 밟는 순간 느끼는 아주 짧은 순간의 희열때문이 아니던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또 한번의 완주에 가벼운 희열이 전신을 감싸 돌았다. 비록 수없이 많은 언덕에 힘이 부치기도 하고 쉼없이 찾아온 근육경련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기도 하였지만 오늘의 이 느낌은 고통이 가져다준 희열이 아니던가?



긴 고통 끝에 맛보는 짧은 순간의 희열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렬하였다. 다른 대회와는 달리 완주율이 아주 낮음에 따른 반사적 만족감이 없지는 않았으나 이 대회가 갖는 차별성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무엇보다도 여느 대회에서와 같은 경쟁심이나 심리적 압박감이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걱정하면서 나름대로의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레이스를 펼치는 것 같았다. 시간이 문제가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러번 목격한 것이지만 불편을 호소하는 주자를 위해서는 모두가 남이 될 수 없었다. 바로 자신의 문제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주자나 자봉하시는 분들이 구분이 모호하였다. 아니 전혀 구분이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보다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모두가 한 마음이었다.다시 말해 주자와 자봉이 한데 어우러져 만드는 한바탕 축제이었다. 어제의 주자가 오늘은 자봉의 역할을 자임하였으며 오늘의 주자는 또 내일의 자봉이 될 수 있는 그런 분위기였던 것이다. 혹서기 대회도 분명히 대회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데도 말이다.



오늘의 이 느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이 행복한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신 대회관계자, 자봉하신 분들, 그리고 호흡을 함께 한 모든 주자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앞으로 주로에서 자주 만나뵐 수 있기를, 그리고 오늘의 이 느낌을 오래도록 같이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2003. 8. 15 혹서기후기 /이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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